Tao 천부경

천부경3

iamthat 2009. 10. 9. 19:15

천부경(天符經)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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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妙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

하나의 묘한 흐름 속에 수없이 왔다갔다하면서 달리 사용(使用)하여도 그 본성(本性)은 달라지지 않는다.

태극 일묘연(一妙衍) 만왕만래(萬往萬來)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 연(衍)은 넘치다, 흐르다, 퍼지다, 아름다운 모양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만(萬)은 전갈의 모양에서 비롯되었지만 많은 수를 나타낸다. 용(用)은 복(卜)과 중(中)이 합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점을 쳐서 곧 시행(施行)한다는 뜻을 나타내며, 쓰다, 행하다, 작용, 통하다라는 뜻이 있다. 하나의 묘한 모양에서 나타나는 흐름은 계속 반복하여 사용하여도 변하지 않으며, 그 근본 또한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시(神市) 때의 발귀리(發貴理)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커다란 하나(大一)에는 극(極)이 있어 양기(良氣)라 부르고,
없다가 있고 비어있다 가득 차면서 묘한 조화(調和)가 이는구나.
삼일(三一)은 그의 모습(體)이며, 일삼(一三)은 그의 작용(用)이니,
서로 묘하게 섞여져 하나로 돌지만 그 모습과 작용은 갈라지지 않네.
끝없이 공허(空虛)한 곳에 빛(光)이 있어, 신(神)의 모습이라 하고,
무한(無限)한 기(氣)가 영원히 있으니 신(神)이 탈바꿈하였네.
여기에서 참된 사명(使命)이 주어지고, 모든 도리(道理, 法)가 나온다네." (24)

모든 것의 집합체(集合體)이자 단 하나의 거대한 세계(世界), 즉 우주(宇宙, Cosmos)라 말할 수 있는 '하나' 자체(自體)의 드러나는 모습과 또한 그것이 어떻게 작용(作用)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짤막하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극(極)은 보통 남극(南極), 북극(北極)으로 구분하여 말하는 자기장(磁氣場)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서로 다른 상반(相反)된 성질이 하나의 덩어리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렇다고 하여도 그 모습, 즉 체(體)로 말하는 물질(物質)이 분리되지 않고, 단지 용(用)이라 말하는 그 두가지 작용(作用)을 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는 마치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어떤 사람을 제삼자(第三者)가 보았을 때, 한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반영(反影)되어 두사람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처럼,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은 똑같은 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 거울은 하나의 본성(本性)이자 우주(宇宙)의 특성(特性)이 되기도 하며, 이것을 현대(現代) 물리학(物理學)에서는 자기(磁氣) 파동(波動)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다못해 모든 물질(物質)의 구성인자(構成因子)인 원자(原子)에서도 이 파동적(波動的)인 자기장(磁氣場)은 관찰되며, 물질의 성분(性分) 구성(構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근본 성격은 상극(相剋)이자 상반(相反)이다. 그러나 이 두 성격이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환역(桓易)의 모습(體)은 둥근 원(圓)이고 그 작용(用)은 네모진 방(方)이 된다. 겉모양(體)이 없기 때문에 그 속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하늘의 이치(理致)이다. 희역(羲易)은 그 모습이 방(方)이고, 그 작용이 원(圓)이다. 겉모습이 있기 때문에 변화를 알게되니 이것이 하늘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역(易)은 모두 모습이면서 작용이기도 하다. 스스로 원(圓)이 되고자 하면 원(圓)이 되며, 스스로 방(方)이 되고자 하면 방(方)이 되고, 스스로 각(角)이 되고자 하면 각(角)이 된다. 이것이 하늘의 사명(使命)이다. 그런데 하늘의 근원은 스스로 하나의 거대한 공허(空虛)인데, 어찌 모습(體)이 있다고 할까. 하늘은 본래 모습이 없지만 28개의 별자리(宿)를 보이기에 이를 모습으로 한다. 대개 천하의 모든 물건들은 이름(名)을 갖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 이름이 수(數)를 갖게되는 것이다." (25) 하늘의 변화(變化)를 본받아 역(易)을 만들었으며, 역(易)이 곧 하늘을 반영(反映)한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이 자기 스스로 마음대로 변하여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여러 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太極 현재 동서양(東西洋)에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다루어지는 주역(周易, 易經)을 설명한 계사전(繫辭傳)에서는 이 변화(變化)를 숫자, 즉 상수(象數)로 표시하여 점괘(占卦)로 활용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주역에서 55는 천하가 움직이는 천지수(天地數)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다룰수 있는 한계(限界)를 벗어난 것이어서 사람이 쓸 수 있는 숫자는 지수(地數)에서 5를 뺀 50까지라고 한다. 이 나머지 5은 신(神)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대연(大衍)의 수(數)는 50책(策)이나 그것을 쓸 때는 (하나를 뽑아 통 속에 집어넣고 쓰지 않기에) 49책(策)이다. 이것을 대충 반으로 나누어 두가지의 모습, 즉 하늘과 땅으로 구분하고, 하나를 걸쳐 얹어서 세가지 모습, 즉 삼재(三材, 三才)로 구분한다. 이것을 다시 넷씩 세어서 사시(四時)를 만들고, 시초(蓍草) 또는 산가지(算木) 하나를 빼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고, 이를 윤(閏)으로 한다. 5년이 되면 다시 윤달(閏月)이 오기 때문에, 다시 또하나의 산가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하나를 걸쳐놓는다. 하늘을 말하는 건(乾)의 수(數)는 216, 땅을 말하는 곤(坤)의 숫자는 144, 모두 합하여 360이 된다. 이것이 1년에 해당하는 날수(日數)이다. 두편(篇)의 책(策)으로 하면 11520, 이것이 만물(萬物)의 숫자이다. 이리하여 네번 헤아려서 역(易)을 이루고, 18번 변하여 괘(卦)를 만든다. 8괘(八卦)로서 조그만 일을 이룬다. 이것을 끌어당겨 펼쳐놓고 같은 부류(部類)에 이어놓으면 천하(天下)의 모든 일이 끝난다." (26)

여기서 두편의 책(策)이란 상경(上經), 하경(下經)으로 나눈 산가지들을 말하며, 건곤(乾坤)의 책(策)을 각각 노양(老陽 -> 少陽), 노음(老陰 -> 少陰)으로 구분하여 계산한다. 양(陽)인 '---'는 1이자 3이어서 3 x 3 = 9이고, 음(陰)인 '- -'는 중간에 3이 하나빠져서 3 x 2 = 6이 되어, 각각의 효(爻)를 구성하게 된다. 이 효(爻)들이 18번 변하여서 6효(爻)로 만들어진 1괘(卦)가 얻어진다. (27) 만물(萬物)을 모두 합한 숫자가 11520가지나 된다고 한다. 이것들이 모이고 합쳐지면서 그 변화가 이루어지고, 그 변화를 어느정도는 미리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주역(周易)은 과거나 현대나 다를 것없이 점술(占卜)의 교본(敎本)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실상 이 주역(周易)은 자연계(自然界)의 수많은 변화(變化)를 통계적(統計的)으로 집약(集約)시켜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역경(易經)의 위력(威力)은 현대(現代) 물리학(物理學)에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이며, 그와 더불어 철학(哲學)이나 기타 분야(分野)에서의 파급(波及) 효과(效果) 또한 상상(想像)을 불허(不許)할 정도로 엄청나다. 실로 방대(尨大)한 분량(分量)의 자료를 정리하여 순서를 매기고, 그 내용을 집약(集約)시킨 것이라서, 단지 몇백년간의 자료(資料)로 이러한 통계(統計)가 이루어졌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삼신(三神)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여러 단계로 구분(區分)하고 세분(細分)하여서 그 변화의 성격과 속성(屬性)을 추려놓은 팔괘(八卦)나 또는 그것을 종합한 역(易)은 모두 하나에서 비롯한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가 스스로 움직여서 분리되고, 다시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며, 또한 스스로 가르치고 교육하여서 상호간에 관계를 맺게끔하며, 이로서 서로간에 주고받음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태극도(太極圖)이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쓴 북송(北宋)의 주돈이(周惇이, 濂溪, 1017~1072)는 태극의 성격(性格)이 "움직임이 극(極)에 달하면 고요해지고, 고요함이 극(極)에 달하면 다시 움직인다"(28) 라는 말을 하였다. 즉 천부경에서 말하는, 열(十)이 되면 다시 셋(三)이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올라가면 내려가게되고,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게 되고, 이러한 순환(循環)과 반복(反復)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事例)는 파동(波動)이다. 물결이 넘실거리면서 춤을 추지만, 그 속 안에 있는 물질(物質)은 그 자리에서 올라갔다 내려가며 계속 원형(圓形)으로 반복운동(反復運動)을 한다. 그렇다고 하여서 그 물질이 이동(移動)하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묘연(一妙衍)"이란 바로 이 파동적(波動的) 성격(性格)을 말하는 것이다. 이 파동은 현세계(現世界)의 물질을 좌우하는 미립자(微粒子)의 성격(性格)이자, 그 근본(根本)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本文)을 살펴보면, "일묘연(一妙衍) 만왕만래(萬往萬來)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즉 아무리 출렁거리면서 움직여도, 또는 아무리 태극(太極) 속에서 음(陰)과 양(陽)으로 변화하면서 움직여도, 그 근본(根本)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

본바탕(本)의 중심(中心)은 해(太陽)이며, 따라서 빛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된다.

환 본심본태양(本心本太陽) 앙명인중천지일(昻明人中天地一) ; 심(心)은 사람의 심장(心臟) 모양에서 비롯된 글자로 중앙, 도(道)의 본원(本原)을 뜻하며, 앙(昻)은 오르다, 머리를 들다, 임금의 덕(德)이 높은 모양을 뜻한다. 명(明)은 해와 달을 붙인 모양으로 해와 달이 같이 있어 밝다는 뜻이 있다. 대변경(大辯經)의 주석(註釋)에서 말하기를, "하늘로 부터의 광명(光明)을 환(桓)이라 하고, 땅으로 부터의 광명(光明)을 단(檀)이라 한다."(29) 그리고 태백일사(太白逸史)에서 소개된 환국주(桓國注)에는 "환(桓)은 모든 것이 하나에 들어있는 전체(全體)이며, 광명(光明)이다. 이 전체(全體)는 삼신(三神)의 지혜(智慧)와 능력(能力)이며, 광명(光明)은 삼신(三神)의 참된 덕(德)이다. 곧 우주(宇宙)에 있는 모든 만물(萬物)의 터전이며, 조상(祖上)인 것이다"(30)라는 말이 나온다.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에서 말하는 환(桓)은 주로 환국(桓國), 환인(桓仁), 환웅(桓雄), 환역(桓易) 등으로 주로 나라와 왕(王)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환(桓)이 바로 하늘이자, 하늘에 있는 빛을 말하며, 세상의 모든 것이 환(桓)에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환(桓)의 한자(漢字)는 홀(笏)이나 팻말, 또는 굳세다는 뜻으로서, 지금 말하는 빛의 의미와는 거의 관계가 없으며, 환(桓)의 중국음은 '후안(huan)', 일본음은 '간(khan)'으로서, 밝은 빛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한글 뿐이 없다. 그러므로 환(桓)은 순수한 우리말이 음역(音譯)된 것으로, '환하다(暉, 瓏)', '희다(白)', '하얗다(白)', '해(太陽)' 등의 매우 밝은 빛을 뜻하는 어휘(語彙)로서, '하늘 건(乾)', '옥고리 환(環)'이나 '알 환(丸)'에 가까운 어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환(桓)은 바로 밝은 빛의 원천(源泉)인 '둥근 해(太陽)'라고 볼 수 있으며, 지금의 천부경은 한문(漢文)이 공식(公式) 언어(言語)로서 정착(定着)된 이후에 재작성(再作成)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천부경에서 말하는 일(一)이 '하나'이자 '하느님'이고 '하늘'이 되는 말은 오로지 한글 뿐이 없기에, 천부경의 원저자(原著者)는 바로 한국인(韓國人, 朝鮮族)인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해가 있고, 그 옆에 나무가 서있는 모양에서 비롯된 글자인 환(桓)은 그 모양이 보여주듯이 밝은 해를 바라보는 나무, 즉 나무처럼 사람이 서서 보는 모양이다. "태초(太初)에 삼신(三神)이 삼계(三界)를 만들었는데, 물은 하늘과 비슷하고, 불은 땅과 비슷하며, 나무는 사람과 비슷하다. 나무라는 것은 땅에 뿌리를 내려 하늘로 나오는 것이고, 사람 또한 땅에 설 수 있기에 나무처럼 하늘로 나오는 것이니 능히 하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31)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수록(收錄)된 글이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이 나무와 같이 땅에 서서 태양의 빛과 정기(精氣)를 받고 자라기 때문이며, 그 존재 이유조차 태양이 있기에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태백일사(太白逸史)를 보도록 하자. 여기에 인용된 조대기(朝代記)에서 말하기를, "옛 풍속(風俗)에 광명(光明)을 숭상(崇尙)하여서 해가 신(神)이 되었으며, 하늘이 조상(祖上)이 되었다. 만방(萬方)의 백성들은 서로 믿으며 의심치 않았으며, 아침 저녁으로 경배(敬拜)하는 것이 변하지 않았다. 태양이라는 것은 광명(光明)의 터전이며, 삼신(三神)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사람이 빛을 얻어 곡물(穀物)을 경작(耕作)하니 저절로 결실(結實)을 맺었다. 아침에는 동쪽 산에 나란히 올라가 해가 뜨는 곳에 절을 하며, 저녁에는 서쪽 강으로 나란히 쫒아가서 달이 뜨는 곳에 절을 한다"고 하였다. (32) 모든 백성들이 밝은 빛을 숭상(崇尙)하여 해를 태양신(太陽神)으로 삼았으며, 태양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많았기에 그 도움에 감사드리기 위하여 매일 태양에게 절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예법(禮法)은 그후 삼륙대례(三六大禮)가 되어 그 의의(意義)를 분명하게 하였다. 3세(世) 단군(檀君) 가륵(嘉勒)의 칙서(勅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천하(天下)의 근본(根本)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중일(中一)에 있다. 사람이 중일(中一)을 잃으면 모든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33)

이제까지 천지인(天地人) 모두 각기 신(神)이 있어, 천신(天神, 一一), 지신(地神, 二一), 인신(人神, 三一)을 말하여 왔다. 그런데 여기서는 중일(中一)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한다. 즉 인간의 마음 속에도 하나의 신(神)이 있어, 그 신(神)을 중일(中一)로 한다는 말이다. 여기 천부경에서 말하는 하나의 세계는 모든 것이 포함되고 태어나며, 그곳에서 소멸(消滅)하고, 또한 그 모든 것이 신(神)의 마음이자, 신(神)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모든 사물과 인간에게는 신(神)의 속성(續性)이 있어, 각기 신(神)으로도 될 수 있다는 점을 내포(內包)하고 있다. 그러한 신(神)이 바로 사람의 중심(中心)인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이며, 이를 중일(中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중일(中一) 속에는 하늘과 땅을 제대로 파악하고, 하늘이 내려준 운명(運命)과 성품(性品), 그리고 정신(情神)을 제대로 알 수 있고, 스스로 그 길(道)을 찾아 가게되는 것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쓴 행촌(杏村) 이암(李암, 1296~1364)은 "그 성품(性品)의 혼(魂)을 깨닫는다는 것은 천신(天神)의 근원(根源)과 같으며, 그 운명(運命)을 받아 태어난다는 것은 자연(自然) 산천(山川)의 기(氣)와 마찬가지인 것이다."(34) 즉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참된 성품을 알게되면 천신(天神)과 같이 득도(得道)할 수 있으며, 천신(天神)의 기(氣)를 이어받아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리고 양(陽)이 되기도 하고, 음(陰)이 되기도 하면서, 하나가 되어 영속(永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천부경에서 말하는 "본심본태양(本心本太陽) 앙명인중천지일(昻明人中天地一)"은 곧 사람에게는 그 근본(根本)이 육체(肉體)와 같은 물질(物質)이 아니라, 그 행동(行動)이자 작용(作用)의 근원(根源)인 마음(心)이며, 그 올바른 마음 속에서 신(神)의 마음인 중일(中一)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중일(中一)은 바로 태양(太陽)의 광명(光明)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에게 태양의 근본(根本)이 전해지고,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一 終 無 終 一

           하나에서 끝나고 무(無)에서 끝나 다시 하나이다.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 인간은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모든 지구(地球) 상의 자연(自然) 세계(世界)를 통하여 사람이 사람임을 깨닫고, 더불어 그 기원(起源)과 원리(原理)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모든 문명(文明)과 문화(文化)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아무리 방대(尨大)하고 엄청난 것이라 하더라도, 단 하나로 이루어진 무한한 우주(宇宙) 속에서 아주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 개인이 주변에 펼쳐져있는 공간 만을 생각한다면 그저 수평선(水平線)과 지평선(地平線)으로 나누어진 하늘과 땅의 두 세계가 보일 것이고, 우주(宇宙) 공간(空間)에 떠서 멀리서 지구를 볼 때는, 칠흑(漆黑)같이 어두운 암흑(暗黑) 속에서 영롱(玲瓏)하게 빛나는 아주 자그맣고 멋진 단 하나의 푸른 물방울처럼 보이게 된다. 우리 인간은 그 조그만 하나의 덩어리 속에서 태어나서 죽으며, 삶의 의미(意味)와 함께 하느님(神)을 찾고, 영생(永生)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게되어, 다시 만물(萬物)이 자리하고 있는 자연(自然)이자, 삼(三)이며, 동시에 일(一)의 세계(世界)와 합치게 된다.

삼일신고(三一神誥) 제5장 인물(人物)에서는 인간과 만물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람과 만물(萬物)이 함께 삼진(三眞)을 받았는데, 오로지 사람들만이 길을 잃고 헤메어, 삼망(三妄)이 뿌리를 내렸다. 삼진(三眞)과 삼망(三妄)이 서로 대립(對立)하여 삼도(三途)를 만들었다. . . . 하나의 의미(意味)를 깨달아, 망(妄)을 진(眞)으로 바꾸면서 대신(大神)이 일어나고, 성(性)이 통하여 공(功)을 이룬다."(35) 여기서 삼진(三眞)과 삼망(三妄)은 성(性), 명(命), 정(精) 그리고 심(心), 기(氣), 신(身) 그리고 감(感), 식(息), 해(解 또는 촉觸)이 모두 선악(善惡)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으로 구분되면서 전체 18가지의 작은 길(途)로 나누어져 지는데, 그 잘된 쪽과 못된 쪽을 말한다. 이러한 삼도(三途)에서 헤메다가 하나의 의미(意味)를 깨달아,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치면서 신(神)을 얻고 성품(性品)이 통하여 득도(得道)하게 된다고 한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업보(業報)와 해탈(解脫)과는 약간 다르지만 거의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즉 화신(化神, 化一)으로서, 인간도 신(神)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화신(化神)의 과정을 대변설(大辯說)의 주석(註釋)에서는 좀더 논리적(論理的)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를 잡아 셋이 포함(執一含三)되는 이유는 하나의 기(氣)에 삼신(三神)이 있기 때문이며,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가는(會三歸一) 이유 또한 신(神)이 삼(三)이 되고 기(氣)가 일(一)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것은 그 현상(現象, 體)이지만 역시 하나의 기(氣)이다. 하나의 기(氣) 안에는 삼신(三神)이 있으며, 지식(智識)의 원천(源泉)에도 삼신(三神)이 있다. 삼신(三神)의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것도 하나의 기(氣)이며, 밖에 있는 것도 일(一)이자, 그 내용도 일(一)이며, 그 일(一)을 통제(統制)하는 하는 것이 삼신(三神)이다." (36) 모든 것이 삼신(三神)의 직접적인 통제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이루어지는 모든 일조차 삼신(三神)이 하는 일이어서, 삼신(三神)이 일기(一氣)가 되고 일기(一氣)가 삼신(三神)이 된다. 삼신(三神)은 원래 우주(宇宙)의 기초원소(基礎元素)가 가득 차있는, 그렇기에 비어있다고 할 수 있는 공간(空間)의 성격(性格)인 삼극(三極)을 형상화(形象化)시킨 것이다. 그것이 다시 지구(地球)에서 형상화된 것이 하늘(天一)이자, 땅(地一)이요, 만물(萬物)을 포함한 인간(人一)을 말하는 또 하나의 삼신(三神)인 것이다. 또한 지구상의 모든 만물은 삼(三)으로 대표하기도 한다.

땅은 양극(兩極)이자, 이극(二極)이며, 음양(陰陽)으로서 대표되고, 하늘은 삼극(三極)이자, 일극(一極)이며, 무극(無極)인 하나(全一)로서, 삼위일체(三位一體)를 형성하여 모든 것을 주관(主管)하는 전지전능(全知全能)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삼(三)이 신(神)이 되었을 때, 삼일(三一)이 되며, 인일(人一, 太一)이 되고, 중일(中一)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일기(一氣)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기(氣)의 자연적인 본성(本性)인 삼극(三極)에 의하여, 분화(分化)되었다가 합일(合一)을 이루면서 영원(永遠)으로 항진(航進)하게 된다. 하나(一)에 들어있는 수많은 세계 속의 만물(萬物)은 오로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근본적(根本的)인 방법(方法)을 통하여 자신들의 근원(根源)이자 출발점이고, 탄생지(誕生地)인 하나를 향하여 접근할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집일함삼(執一含三)과 회삼귀일(會三歸一)로 압축(壓縮)하여 놓은 것이며, 또한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천부경(天符經)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나열(羅列)해놓은 숫자나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내용(內容)은 단지 모든 것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숫자가 필요하며, 따라서 언어(言語)가 필요하고, 그 외 부수적(附隨的)으로 따라가는 여러가지가 모두 필요하게 되며,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진 다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열(十)까지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요함이 극(極)에 달하면 움직이고, 움직임이 극(極)에 달하면 고요해진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적용할 수 있다. 끝으로 천부경에서의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라는 마지막 구절(句節)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에서 끝나지만, 이 또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기(氣)라는 무(無)의 존재(存在)에서 끝나는 것이며, 다시 그 하나에서 영원하게 시작과 끝이 나온다는 말이다. 마지막에 들어있는 하나(一)는 바로 81자를 총괄(總括)하여 대표(代表)하는 것이자, 마지막이 시작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